마르크스주의 해외에 대한 발신
〔마르크스주의 해외에 대한 발신/ 제1탄〕
노동자계급 투쟁은 자본주의사회을 근본적으로 파악했을 때 결정적인 힘을 얻게 된다. 자본주의사회란 뭣인가. 그것을 밝힌 것이 마르크수주의다. 투쟁하는 노동조합을 되살리는 것과 마르크스주의를 노동자의 손으로 되찾는 것은 하나다. 스탈린주의에 의하여 외곡되어 본래의 모습과 닮은 데가 없는 것으로 변질을 받던 마르크스주의를 모든 외곡을 치워 버리고 노동자 계급의 사상으로 되살려내자.
그 사업의 첫걸음으로 <임노동과 자본>에 관한 마르크스의 제기를 다시금 파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아래는 일본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의 정치기관지인 ‘공산주의자’제159호(2009년1월 발행)에 게재된 논문 ‘임금노례의 쇠사슬를 끊어라 - 마르크스 “임노동과 자본”을 배운다’(하타다 오사무)를 바탕으로 그 내용을 수차레에 나누어 일부 요약하면서 소개한다.
임금노례의 쇠사슬을 끊어라
마르크스 ‘임노동과 자본’을 배운다
제1회
[I] 자본주의사회의 본질을 파헤친 마르크스
(1) 세계대공황은 혁명의 시대
미국을 진원지로 한 금융공황은 전세계로 파급하면서 금융 뿐만 아니라 모둔 산업을 휩쓰는 대공황이 되어 제국주의 세계지배을 미증유의 위기로 몰아넣았다. 자본주의 300년 역사상에서도 본 적이 없었던 사태이다. 전세계에서 노동자가 “생존권을 달라”는 투쟁에 일어나고 있다. 세계는 혁명 정세에 있다. 미국 FRB(연방준비제도위원회) 전 의장 그린스판이 “100년에 한번의 신용위기 쓰나미”라고 말했지만 그런 정도의 인식은 천박하다. 100년에 한번은 커녕 이제야 자본주의는 끝장난 것이다. 자본주의의 명맥은 끊겼다. 이제 프롤레타리아트가 마지막 일격을 가하면 된다.
노동자 계급이 마음 속으로 기뻐하며 떨쳐나설만한 정세가 왔다. 자본주의 성립 이후 전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피를 흘리며 목숨을 걸고 자본가와 국가권력에 맞서 싸워 온 것인가. 빈곤과 기아,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하여 숱한 노동자가 싸워 온 것이다. 드디어 그 승리를 함께 쟁취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노동자와 노동조합 모두가 그런 시대인식에 입각하여 억압을 받고 있는 모든 이들의 앞장에 서서 “이제야 착취와 억압의 근원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며 진격의 깃발을 흔들 때다.
(2) 분노를 터뜨리자
자본주의의 원리가 노골적으로 노출된 것이 신자유주의이다. 제국주의자는 자본주의의 체제적 차질을 돌파하기 위하여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세를 결정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시장원리에 맡기겠다”고 하면서 자본의 이익 추구에 제약을 가해 온 갖가지 규제를 풀어 주었다. 임금삭감, 구조조정, 비정규직화, 노동강화 등 노동현장에서의 착취를 국한적으로 강화했다. 얼마 안되는 사회보장도 해체하고 노동자의 세금부담을 강화하고 소비분야에서도 고금리 주택론 등을 통해 노동자 수탈을 강화했다.
그 결과 전세계에서 생긴 것은 무엇인가? 대규모 실업, 워킹푸어(working poor), 빈곤과 기아의 세계화이다. 노동자계급의 건강과 새활 파괴, 가족 붕괴이다. 생태 파괴이며 온갖 공동성의 파괴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없는 사회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금융위기에 돌입하여 기업의 도산과 대량 해고, 대규모 증세, 전쟁 등 온갖 희생을 노동자계급에 떠넘겨 부르주아지만은 살아남으려고 하는 것이다.
정말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전세계에서 노동자계급의 분노가 터지고 있다. 그것이 대공황을 더 촉진시키고 제국주의를 죽음의 벼랑으로 몰아넣고 있다.
그렇다! 노동자는 자본가의 노예가 아니다! 자본가가 시키는대로 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제 마음 속의 분노를 폭발시킬 때다.
자본가의 일방적 돈벌이에 의해 해고당하고나 전쟁에서 죽음을 당하는 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명인가? 자본가가 허용하는 범위 밖에서는 노동자는 살 수 없는 것인가? 그것은 절대로 아니다. 우리의 단 하나의 목숨을 자본가들이 돈벌이 수단으로 하여 자기 이익을 위해 좌지우지하고는 결국은 거리에 내모는 것을 노동자는 더이상 참을 수 없다.
“우리를 깔보지 마라! 우리는 반드시 너희들 자본가을 무덤에 묻어 줄 것이다!”--‘공산당선언’과 ‘임노동과 자본’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선언한 것은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 투쟁이 굉장한 규모로 전세계에서 시작된 것이다.
(3) 노동운동의 원리과 원칙을 부활시키자
“돈벌이야 전부다” “경쟁사화다”라고 하는 신자유주의에 맞서 노동자계급은 다른 원리를 가지고 대립하고 있다. 그것은 “단결”이자 “모두가 한 사람을 위하여, 한 사람이 무두를 위하여” “단 한 명의 해고와 박해도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것이 노동운동의 원리, 원칙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회주의의 핵심이다.
그런데 체제내 노동운동 지도부는 이와 같은 노동운동의 원리, 원칙을 던져 버리고 자본가의 앞잡이가 되어 구조조정과 임금삭감에 협조해 왔다. 지난 20여년 동안 임금삭감, 구조조정, 고용파괴 등 신자유주의 강풍이 거칠게 불어댄 것은 오로지 지배계급이 공세를 강화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기존 의 노동운동 지도부의 총굴복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런 체제내 노도운동 간부들을 물리치지 않는 한 노동자는 살아 갈 수 없다.
노동자계급은 본질적으로 신자유주위와 함께 할 수 없다. 근본적으로 대립하고 있다. 노동자에게는 자본가의 포학에 맞서 싸우는 대단한 힘이 있고, 긍지가 있다. 이러한 현장노동자의 힘을 끝가지 믿고 신뢰하고 투쟁해 나가면 노동조합이 통째로 전투조직으로 되는 것이다. 그것을 실천으로 보여준 것이 도로치바(국철치바동력차노동조합)다. 도로치바 투쟁을 철저히 배우고 그것을 무기로 투쟁하는 노동조합을 전국에서 되살리자. 우리가 지금 마르크스의 ‘임노동과 자본’을 배우려고 한는 젓도 바로 그러한 오늘날의 실천과제 때문이다.
(4) 마르크스의 불굴의 정신을 공유하자
1849년 ‘신 라인신문’에 발표(연재)된 ‘임노동과 자본’에는 같은 시기에 집필된 ‘공산당선언’과 아울러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노와 프롤레타리아혁명에 대한 열정이 넘치고 있다. 거기에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마르크스의 말을 통하여 분노를 표출하여 투쟁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것을 알아차리자.
마르크스는 1847년12월 부뤼셀에 있는 독일인노동자협회에서 강연했고 이것이 ‘임노동과 자본’의 토대가 되었다. 그리고 전유럽을 휩쓴 프롤레타리아트의 반란인 1848년 혁명에 궐기하다 패배한 후 경찰의 탄압을 받는 신세에 처하면서도 굳건하게 싸웠다. 당시 마르크스는 빈곤의 바닥 에 있었고 빚쟁이에 시달리는 신세였다. 그래도 기죽지 않고 투쟁을 유지했다.
마르크스는 ‘임노동과 자본’의 첫머리에서 48년 혁명을 평가하여 아래와 같이 말한다.
“모든 혁명적 봉기는…혁명적 노동자계급이 승리하기 전까지는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또 모든 사회개조는 프롤레타리아혁명과 봉건적 반혁명이 무기를 들고 승리하기 전까지는 공상에 그친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입증했다.”
얼마나 아귀센 평가인가. 비록 패배할지라도 “우리는 계급적인 진리를 증명한 것이다. 애매한 결착은 없다. 프롤레타리아혁명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음에는 절대로 승리한다”는 아귀센 평가를 한 것이다. 그 불굴의 정신, 투쟁의 의지를 공유하고 싶다. 나아가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독자들도 1848년의 계급투쟁이 대규모 정치 투쟁의 형태로 버러진 것을 지켜 보았으므로, 이제 노동자 노예 상태의 토대인 것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지의 존립과 그 계급지배의 토대인 경제관계 그 자체를 좀더 상세히 파고들 때가 되었다.”
여기에 ‘임노동과 자본’의 주제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다가오는 세계혁명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기 위해 노동자의 노예상태의 근원은 무엇인가, 부르조아지의 계급지배력의 원천은 무엇인가, 이들 상호 관계는 무엇인가를 명박하게 하려고 했다. 그렇게 하면 노동자계급 진영의 강점과약점도 알아낼 수 있고 적들 진영의 약점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5) 체제내 ‘개량주의’와의 당파투쟁
마르크스도 오늘날 우리처럼, 투쟁을 체제내에 처박으려는 세력들과 싸웠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이론투쟁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교훈적인 것이다.
특히 소부르주아 개량주의자인 프루동에 대한 투쟁은 중요했다. 프루동은 사유재산제와 분배의 불평등을 비판하여 ‘인민은행’창설 등을 주장했다. 그 한편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노동자계급을 해방의 주체로는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구제의 대상으로 간주했을 뿐이다.
프루동의 주장은 자본주의의 기초에 손댈 것 없이 인간의 평등이 실현될 수 있다는 듯이 환상을 퍼뜨리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프루동에 대하여 “근대사회의 생활조건들은 그대로 둔 채 그것이 필연적으로 낳는 투쟁과 위험만은 없이지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비판하며 프루동을 “사회주의적 부르주아”라고 단정하였다.
이 부르동에 대한 비판은 현제적인 의의를 갖는다. 이러한 체제내적인 자본주의 비판은 그 어느 시대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스탈린주의당인 일본공산당이다. 공산당 위원장 시이 가즈오는 금융대공황을 두고 “투기 머니가 나쁘다. 이를 규제하여 룰이 있는 자본주의를 만드는 것이 과제이다.” “통상적인 투자로 물건을 생산하여 이익을 얻는 자본주의는 건강하다.” “경영자는 노동자를 인간으로 소중하게 취급하는 경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사회주의는 아직 이르다.”라고 주장한다. 프루동과 빼닮았다. 자본과 임노동의 관계에는 하나도 손대지 않고 노동자계급의 힘을 얕보고 자본가 입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노동자를 한없이 착취함으로써 성립되는 자본주의를 “건강하다”고 하는 것 자체가 반노동자적인 일이다. 게다가 자본주의가 결졍적으로 부패를 심화시키면서 사멸의 과정에 접어들고 있는데도 그 붕괴를 앞당기는 것은커녕 그 붕괴를 막으려고 하는 것이다.
스탈린주의 일본공산당이나 렌고(일본노동조합총연합)의 노동귀족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자나 소부르주아적인 학자 등 모둔 체제내 세력의 입장에서는 자본주의가 붕괴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하는 것이자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자본주의 붕괴를 두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자본주의가 쓰러져야 그 곳에서 처음으로 인간이 역사창조의 주인이 될 수 있는데 체제내 사람들은 붕괴하고 있는 자본주의에 매달리는 것 밖에 못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새로운 시대를 열어놓을 수 있는 존재이다.
(6) 자본주의의‘착취의 비밀’을 파헤친 마르크스
마르크스의 시대에 경제학자들은 이륜,지대,임금을 ‘소득의 세 가지 원천’이라고 해서 자본가,지주,노동자가 그 몺에 부응한 이익을 나누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동자가 가난한 것은 너무 많이 자식을 낳기 때문니다, 노동자는 산아제한을 해야 한다 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다.” 마르크스는 말했다. 자본가와 지주들은 노동자를 착취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결코 자유평등한 사회가 아니라 노예사화와 본질적으로 다름이 없는 계급사회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계속 자본가와 싸워 왔고 지금도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 라고 마르크스는 지금 현재 터지고 있는 노동자계급의 폭동, 파업을 100프로 지지한 것이다.
그 착취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임금’이다. 임금이야 말로 노동자를 자본가에게 얽매는 쇠사슬이며 임금제도 속에 착취의 비밀이 숨어 있다. 마르크스는 그 것을 해명했다.
이렇게 착취의 구조를 파헤친 것은 마르크스뿐이다. 다른 어느 유명한 경제학자도 이러한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오늘날 이 시대에도 마르크스주의자 이외는 노벨상 수상 경제학자들을 비롯하여 엉터리 ‘경제학’을 전개해 자본의 이익을 옹호하며 착취를 은폐하기 위한 어용학문을 그럴듯하게 선전하고 다닌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가 이번 세계대공황을 예축할 수 있었는가? 자본주의의 운동과 그 역사적인 한계를 올바르게 해명할 수 있는 것은 마르크스주의를 무기로 한 프롤레타리아트뿐이다.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선지 300년 동안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와 싸워 왔다. 그 동안 투쟁이 멈춘 적은 한 순간도 없었다. 투쟁하지 않으면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당하기 때문이다. 노예도 죽음에 처해야 무기를 들고 주인에 맞선다. 임금노동제가 지속되는 한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끝나지 않는다. 노예의 쇠사슬을 끊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자본가의 이익을 지키고 착취를 덮어 가리고 노동자의 저항의 엄니를 빼기 위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철저히 대결하고 분쇄하자. 승리할 수 있는 이론적이고 사상적인 무기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 그것이 마르크스주의다. 마르크스주의야 말로 진정한 과학이며 ‘노동자의 이론’이다.
도로치바 나카노 히로시 전위원장은 그 저서인 ‘되살아나는 노동조합’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르크스만이 노동자의 존재를 인정해 주었다. 마르크스만이 이 세상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노동자라고 말해 주었다. 마르크스만이 세상을 변혁할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은 노동자계급뿌니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노동자는 모름지기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노동자가 마르크스주의로 무장한는 것은 노동자가 혁명의 기회를 잡아 승리하기 위해서이다. 마르크스주의를 모든 노동자의 무기로 만들어 나가자.
--------------------------------------------------------------